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-수 전쟁 (문단 편집) === [[각개격파|하나 둘씩 격파]]되기 시작하다 === 수의 수군은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상륙했다. 물론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그곳에는 고구려의 친위대와 수도의 대군이 기다리고 있었다. >[[영양왕|고려의 군주 고원]]이 경내의 군사들로 맞서 진을 펼쳤는데 그 길이가 수십리에 달하였다. 장수들이 두려워하였다. >내호아가 웃으면서 부장 [[주법상]]과 군리들에게 말하였다. 본래 고려에서는 청야전술로 우리를 맞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죽기를 자처하다니, 마땅히 저들을 물리치고 아침밥을 먹으리라 >[[영양왕|고원]]의 아우 [[영류왕|고건무]]는 용맹과 무공이 절륜하였는데 결사대 수백을 이끌고 맞섰다..(중략).. [[내호아]]가 크게 승리하여 평양성 외곽에 이르렀는데 참획한 것이 셀 수 없이 많았다. >{{{#!wiki style="text-align: right" '''《북사》 내호아 열전'''}}} 수군은 여기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승리를 거머쥐고 기세가 오른 채로 평양성 앞에 접근한다. 다른 군대의 합류를 기다려야 한다는 부장 [[주법상]]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4만의 병력을 가려뽑아 평양성 직공에 나선다. [[파일:external/contents.nahf.or.kr/map.jpg]] >우리 장수는 나성 안의 빈 절에 병력을 숨겨두고, 다른 병력을 출동시켜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였다. 내호아가 쫓아 성으로 들어와서, 병력을 풀어놓아 약탈을 하게 하면서 다시 대오를 갖추지 않았다. >{{{#!wiki style="text-align: right" '''《삼국사기》 고구려 본기'''}}} 이제 고구려군의 낚시가 시작됐다. 평양성은 외성 - 중성 - 내성 - 북성의 4중 구조인데 군대를 숨긴 채 일부러 패하는 척하며 적을 외성 안으로 유인했다. 내호아가 약탈을 허용하자 수나라 병사들은 이리저리 흩어졌고 그 때부터 고구려군이 미끼를 문 수나라군을 낚아올리기 시작했다. 이 타이밍을 노려 왕제 건무는 500명의 결사대로 적진을 휩쓸었고 매복했던 고구려군이 수나라군을 도륙하였다.[* 즉 전근대적인 '''[[시가전]]'''을 벌였다는 것이다.] >[[영양왕|고원]]의 아우 [[영류왕|건무]]가 결사대 500명을 뽑아 공격하였다. [[내호아]]는 이로 인해 퇴각하였다. >{{{#!wiki style="text-align: right" '''《수서》 내호아 열전'''}}} >숨은 병력이 나가니 내호아가 크게 패하여 겨우 붙잡히는 것을 면하였고, 사졸로서 돌아간 자는 수천에 불과하였다. 아군이 추격하여 배 있는 곳에 이르렀으나, 주법상(周法尙)이 진영을 정비하고 기다리고 있어 아군이 후퇴하였다. 내호아가 병력을 이끌고 돌아가 바닷가 포구에 주둔하였으며, 머무르면서 다시는 감히 여러 군대에 호응하지 못하였다. >{{{#!wiki style="text-align: right" '''《삼국사기》 고구려 본기'''}}} 중국 측에서도 절륜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고건무의 무공은 대단했던 모양이다. [[장료]]를 연상케 하는 그의 돌격에 평양을 직공하려는 수나라의 회심의 일격은 무력화되었다. 또한 육로로 평양을 향하던 30만 육군과의 연계 역시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. 만약 수군이 30만 육군 별동대와 평양성 근교에서 합류, [[보급]] 문제를 덜어주게 된다면 좀 더 위협적이었을 것이다. 한편 우중문의 별동대는 [[평양성]]까지는 어떻게든 도착했지만 적의 도읍을 코앞에 두고서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였다.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여있던 우문술에게 [[을지문덕]]이 편지를 보내왔는데, "군사를 보내면 왕과 함께 항복하겠다"라는 내용이었다. 이때 을지문덕은 유명한 [[여수장우중문시]](與隋將于仲文詩 '''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''')를 보낸다. 언뜻 글만 보면 적을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글로 보이지만 전황을 파악 못하는 바보가 아닌 이상 글에 담긴 뜻은 명백했다. "너희는 이미 졌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그만 퇴각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?" 이 도발에 우문술도 우중문도 분노했지만,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는 바보들이 아니었던 그들은 더이상 작전속행이 불가하다고 판단, 퇴각을 명령했다. 수군은 [[방진]]을 치면서 후퇴했는데, 이는 물론 고구려의 공격을 염려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.[* [[일본]]의 [[미야자키 이치사다]]는 이때의 수군의 퇴각 모습을 [[1812년]]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|나폴레옹]]의 [[러시아 원정|모스크바 퇴각]]에 비유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